2026. 08. 03.

10년 새벽,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좋은 사람이 되다

이혜성의 1% 북클럽|2026. 08. 03.

패션회사의 CEO로 18년을 일하면서, 동시에 10년 동안 매일 새벽을 바쳐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홀로 완역한 사람이 있다. 김정아 박사다. 스스로를 "도스토옙스키 전도사"라 부르는 그는, 이번 만남에서 왜 10년이라는 시간을 그 무거운 책들에 쏟아부었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핵심 이야기

김정아 박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은 하나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됐다." 그는 원래 콤플렉스가 많고 불안이 컸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런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 특히 사회 최하위 취급을 받던 인물들 속에서마저 연민을 발견해내는 작가의 시선을 10년에 걸쳐 옮기면서, 사람을 보는 자신의 눈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생애 자체가 그 메시지의 근거였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대 앞까지 섰다가 황제의 특사로 마지막 순간 살아난 인물이다. 시베리아에서 4년간의 강제노동, 평생을 따라다닌 간질, 그리고 동시대 작가 톨스토이·투르게네프와 달리 귀족이 아닌 평생 생계형 작가로 겪은 궁핍까지,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 관용, 연민, 그리고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었다.

김정아 박사는 이 정신을 번역이라는 몸의 노동으로 옮겼다. 그는 번역을 "육체노동이 아니라 제의"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몸을 갈아 넣어 문학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라는 뜻이다. 그 말대로 그는 10년 동안 눈과 허리, 관절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매일 새벽 책상 앞에 앉았다.

주요 내용

새벽 1시, 두 아이의 엄마가 세운 번역 루틴

새벽 번역 루틴은 사실 번역을 위해 만든 습관이 아니었다. 두 살, 네 살배기 두 딸을 데리고 미국 유학을 떠난 직후 IMF가 터져 환율이 두 배 넘게 뛰었고, 형편이 어려워진 그는 도움 없이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아이들을 8시에 재우고 자신도 함께 잠들었다가, 새벽 12시 반에서 1시 사이에 일어나 남은 시간에 공부와 강의 준비를 했다. 그렇게 몸에 밴 새벽 기상이 한국에 돌아와 패션회사 CEO로 일하면서도, 그리고 4대 장편 완역을 시작하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이 시간을 "산문적인 낮"을 버티게 해주는 "시적 시간"이라고 불렀다.

결과만 보면 하루 서너 시간, 원고지로는 하루 서너 페이지씩이었다. 10년이 걸릴 줄 알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알았다면 시작도 못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포기를 고민한 순간은 없었다고 말한다. 독자와의 약속, 출판사와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몸이 먼저 무너진 10년의 무게

『죄와 벌』을 앉은 채로 번역한 뒤 허리가 상해 스탠딩 데스크를 구입해야 했고, 마지막 권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러서는 관절이 아파 한 시간 이상 서 있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도가 나가지 않자 그는 체중을 줄여서라도 통증을 줄이는 쪽을 택했다. 번역이라는 작업 하나를 위해 생활 전체를 바꾼 셈이다.

수입만 놓고 보면 이 10년은 아들의 표현대로 "호구" 같은 선택이었다. 목표했던 500부, 1억 원어치가 30분 만에 완판되고 최종적으로 약 2억 7,500만 원어치가 팔렸지만, 저작권료 10%를 10년으로 나누면 한 달에 23만 원 꼴이었다. 그는 이 계산을 듣고 오히려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매일 새벽 천재와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돈까지 받으면서 했다. 나는 남는 장사를 한 거다."

색깔로 완성한 럭셔리 한정판

김정아 박사는 이번 완역본을 처음부터 럭셔리 한정판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미국 유학 시절 형편이 어려운 중에도 도스토옙스키의 고급 한정판이 나오면 사 모았을 만큼, 그에게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나온 네 권은 각각 작품을 상징하는 색을 입었다. 『죄와 벌』은 죽은 듯 보이던 땅이 봄에 되살아나는 회복과 부활의 초록, 『백치』는 순결과 그리스도적 인물을 상징하는 흰색, 『악령』은 등장인물 대부분이 죽어나가는 피의 붉은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러시아어로 '검다'는 뜻을 담아 원초적인 생의 욕망을 상징하는 검정이다.

그는 20만 원이 넘는 이 한정판이 완판된 것을 두고 "책이 몇십만 원이 되면 안 된다는 법칙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깨졌다"며 반가워했다. 번역가의 세월이 통째로 담긴 책이라면, 값을 아끼지 않는 독자가 있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것이다.

웃음과 눈물 사이, 우라 만세 삼창

10년의 고행에도 소소한 기쁨은 있었다. 『죄와 벌』 속 수다스러운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살하는 장면을 번역하던 새벽, 그는 홀로 "우라 만세" 삼창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말이 유독 많고 어려운 이 인물이 사라지면서 번역이 한결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원래 계획대로 2부까지 썼다면 번역이 17, 18년은 걸렸을 것이라며, 미완성으로 남겨진 데 대해 다소 짓궂은 안도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반대로 눈물도 있었다. 이반이 신을 향해 항변하는 대목을 번역할 때는 낮에 하늘만 봐도 눈물이 흘러 백화점 미팅 직전까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흰자위가 부어 병원에 갔고, 의사에게서 4주간 울지 말라는 처방까지 받았다. 그는 그 순간에도 "눈이 멀더라도 번역을 끝내고 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미완성이라 완성인 이유

김정아 박사가 가장 깊이 감정을 쏟은 대목은 따로 있다. 그는 이 소설의 인물 알료샤가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잃은 막내아들의 이름과 같다는 사실을 짚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쓰던 중 자신에게서 물려받은 간질로 어린 아들을 잃었고, 그 상실 이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자질을 모아 알료샤라는 인물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번역하던 순간을 그는 "가슴이 찢어졌다"고 표현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1부에서 끝내지 않고 2부까지 쓸 계획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정아 박사는 이를 두고 "작가의 의도로는 미완이지만, 나는 이것이 완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오히려 아름답듯, 미완으로 남은 이 소설 역시 그 자체로 더 이상 손댈 곳 없는 완성본이라는 뜻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 하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요약한다. "감사가 많아지면 불안이 들어설 여지가 줄어든다." 열 번 노력해서 하나도 얻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한다. 힘들 때마다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 존재였기에, 그는 지금도 이 두 스승 — 작가와 그의 인물들 — 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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